숨은 기억의 심리 분석
숨은 기억의 심리 분석을 위해 뇌의 두 가지 기억 시스템으로 얘기해 보고자 한다. 트라우마는 인간에게 치명적이고 무거운 경험입니다. 견디기 힘들 만큼 고통스럽고 두려운 경험이기에 이러한 끔찍한 경험을 하고 나면 우리 인간은 누구라도 부정적으로 변하기 쉽습니다. 특히 자신에 대해서 부정적이고 극단적인 생각을 떨쳐버리기가 어렵습니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면 트라우마의 희생자들이 지나치게 비합리적이고 부정적인 생각에 매여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친구나 가족들은 "제발 다 지난 일이니 잊어버려라.", "죽은 사람은 죽은 거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않니?" 등의 충고와 조언을 하게 되지요. 하지만 섣부른 충고와 조언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단순히 세월이 흘러간다고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들이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여전히 트라우마의 고통이 강렬하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기억의 시스템에 관해 얘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경험은 뇌 속의 신경 세포들과 정보를 나누어 기억의 형태로 저장됩니다. 이렇게 기억을 저장하고 있는 신경 세포 간의 연결, 즉 기억의 신경 회로는 뇌 전반에 걸쳐 퍼져 있는데, 어디에 어떤 기억이 저장되느냐 하는 것은 기억의 종류에 따라 달라집니다. 인간의 기억 시스템은 내재적 기억(implicit memory)과 외현적 기억(explicit memory)이라고 하는 두 개의 기억 시스템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것은 프로이트가 말한 무의식, 의식과 비슷하기는 하나 정확히 똑같은 의미는 아닙니다. 내재적 기억은 무의식의 기억으로서 생후 바로 활성화되어 발달하는 기억 시스템입니다. 주로 편도체가 관여하고 있으며 정서적 기억, 신체 감각적 기억, 행동 기억 등과 같은 비언어적 기억이 이에 속합니다. 이러한 기억들은 시간 개념이 없기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의 구분이 어려우며 언제 어디서 경험했는지에 대한 정보도 없습니다. 특별히 집중하지 않았는데도 그냥 저절로 입력된 기억들입니다. 그래서 또한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출력되어 나오는 기억이기도 하죠. 이 내재적 기억은 비록 의식적으로 자각하지 못하고 논리적인 말로도 표현하기 어렵지만 통해 지속되기 때문에 여전히 현재의 어떤 행동이나 감정 그리고 신념이나 가치관에도 커다란 영향을 줍니다. 외현적 기억은 약 3세 이후 말을 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 발달하는 기억 시스템으로 주로 해마가 이에 관여합니다. 말로 이야기할 수 있는 기억,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한 기억, 자신이 경험한 것에 대한 기억, 단어의 의미에 대한 기억 등과 같이 주로 언어적 기억이 여기에 속합니다. 외현적 기억 시스템에는 시간 개념이 있어서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뚜렷한 구분이 가능합니다. 그 속에는 또한 경험을 평가하고 분류하고 전후의 관계를 파악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외현적 기억을 하기 위해서는 의식적인 자각과 집중하는 주의력이 필요합니다. 과거의 어떤 일들을 회상할 때 그 경험의 세세한 것들을 의도적으로 떠올리려고 하면 언제였는지, 어디에 있었는지, 누구와 무엇을 하였는지 등과 같은 전반적인 맥락이 함께 떠오르는 것이 바로 외현적 기억입니다. 그래서 외현적 기억은 '나는 누구인가' 하는 자기 정체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태어나서 세 살 정도까지는 해마가 아주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때의 기억은 우측 뇌의 편도체라는 곳에 내재적 기억의 형태로 저장되어 남게 되고, 외현적 기억으로는 저장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유아기의 기억을 이야기로 기억해내지 못하고 주로 신체 반응, 정서 반응과 같은 내재적 기억의 형태로만 떠올리는 것이지요. 예를 들자면 유아기에 경험한 엄마의 좋은 향이나 모유의 냄새는 그것과 연관된 세세한 기억을 떠오르게 하지는 않지만 안정되고 평안한 느낌을 불러일으킵니다. 어떤 사람은 이유 없이 괜히 미워지고 거리를 두고 싶고, 어떤 사람에게는 자신도 모르게 친밀감을 표현하며 다가가게 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내재적 기억의 영향일 수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이러한 내재적 기억 시스템과 외현적 기억 시스템이 서로 상호 보완적인 조절 기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인간은 보다 더 성숙하고 배려심 깊고 합리적인 판단과 행동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기억의 신경과학적 입장에서 보면 무의식을 의식화하도록 돕는 대부분의 정신 치료는 바로 이 내재적 기억과 외현적 기억 사이에 더 많은 신경 회로가 연결되도록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 10년간 뇌 과학의 발달은 어린 시절 경험한 많은 트라우마 경험들이 인간의 뇌와 행동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주었습니다. 트라우마의 경험은 뇌의 정보 처리 시스템에 마비를 일으켜 일상의 기억이 저장되는 해마의 기능을 억제하고 부정적 기억들과 감정이 저장된 편도체를 활성화합니다. 이렇게 되면 트라우마의 기억은 주로 우측 뇌의 편도체에 내재적 기억의 형태로 저장됩니다. 즉 트라우마의 기억은 강렬한 신체 감각들과 이미지 그리고 정서의 상태로 조각조각 분리되어 통합적인 이야기 기억으로 전환되지 않은 채 저장이 되는 것이죠. 트라우마 기억이 시간이 지나가도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것이 시간의 개념이 없는 내재적 기억의 형태로 저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강렬한 감정으로 느껴지는 트라우마 기억은 이야기 기억으로 전환되기 어려운 탓에 많은 트라우마 피해자들이 자신의 고통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데 애를 먹습니다. 또한 트라우마의 기억은 아주 조그마한 단서에 의해서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르지만 어떤 기억이 자극하였는지 알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이러한 트라우마의 기억을 치료하는 것은 신체 감각, 감정, 이미지 등등으로 분리된 내재적 기억을 외현적 기억으로 전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서적 기억, 신체 감각의 기억을 새로운 이야기 기억으로 통합시켜나가는 것이죠. 기억은 살아가면서 계속해서 새롭게 써나가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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